도이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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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이의 입구는 1019년, 여진족 해적이 일본 규슈 지역을 침략한 사건을 말한다.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일본 연안에는 해적의 출몰이 잦았는데, 특히 1019년에는 약 50척의 배를 이끌고 쓰시마와 이키를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들은 쓰시마 은광을 불태우고, 365명을 살해, 1,289명을 납치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으며, 하카타까지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고려는 일본인 포로를 구출하여 송환하며 양국 관계가 개선되었지만, 일본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소우기》 등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진족의 활동과 동북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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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의 입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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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도이의 입구 |
날짜 | 1019년 5월 4일 - 1019년 5월 20일 |
장소 | 일본 규슈 쓰시마섬 이키섬 |
결과 | 고려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씨 고려 진명선병도부서 |
교전국 2 | 여진 (동여진) |
지휘관 | |
일본 측 지휘관 | 후지와라노 마사타다 후지와라노 다카이에 후지와라노 마사노리 오오쿠라노 다네키 다이라노 무네미츠 다이라노 다메카타 마쓰라토 |
고려 측 지휘관 | 장위남 |
여진 측 지휘관 | 불명 |
병력 규모 | |
여진 측 병력 | 약 3,000명 |
피해 규모 | |
일본 측 피해 | 일본 여성 다수 납치 및 노예화, 가축 살해 |
사망 및 납치 피해 | 850명 이상 (사망 350명, 노예 1,300명). 한국인에 의해 8척의 배에서 259명 또는 270명이 귀환. |
고려 측 피해 | 불명 |
여진 측 피해 | 고려에 의해 선박 8척 나포 |
2. 배경
9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일본 연안에는 해적들이 출몰해 관물을 실은 배를 습격하거나 약탈하였다. 특히 피해가 심한 곳은 규슈 지역인 지쿠젠, 지쿠고, 히젠, 히고, 사쓰마 등지였다.[26] 일본 연안에 출몰하는 해적 가운데는 외국, 특히 신라에서 온 해적(신라구)도 있는가 하면, 현지 해상 세력이 관리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해적질에 나서거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처럼 이들 해적을 진압하러 온 관리로써 아예 현지에 눌러앉아 그 자신이 해적의 두령이 되어 관물 약탈에 나서는 자들도 있었다.
고려는 고려 태조 20년/일본 조헤이(承平) 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교 의사를 밝히고 국첩을 바쳤지만,[26] 일본은 고려 태조 22년/덴교 원년 2월에야 오에노 아사쓰나를 시켜 고려의 광평성 앞으로 보내는 답서를 작성하게 하였고,[27] 3월에 다자이후를 통해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답서를 전달하였다. 고려 태조 23년/덴교 3년 6월에도 고려는 일본에 첩장을 보냈지만, 일본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일본의 사학자 모리 가쓰미는 견당사 폐지(894년) 이후 국풍 문화에 심취한 일본 조정이 대외교섭에 소극적으로 변모해 외국의 교섭 요구에 상당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국의 김상기는 9세기 전반에 걸쳐 신라구 등 신라로부터의 무력 압박에 시달린 기억이 있었던 일본으로써는 신라를 병합하고 건국된 고려, 더욱이 그 자신이 해상 세력의 수장이기도 했던 왕건의 요구에 고심했을 것으로 보았다.
고려 성종 16년/일본 조토쿠(長德) 3년 6월, 고려는 다자이후의 일본인을 시켜 일본국완(日本國宛) · 쓰시마도사완(對馬島司宛) · 쓰시마완(對馬宛) 등 세 통의 첩장을 일본측에 전달하였는데, 고려측의 첩장을 접한 일본 정부는 지난 번의 첩장과는 달리 상당히 비례(非禮)임을 지적하였고, 다자이후에서 신청한 4개 조항을 서둘러 허락하고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1019년 당시, '도이'(되한국어)는 한국어로 '오랑캐'를 의미했다. 10월 1일, 조정 남전(南殿)에서 천황과 좌우 내대신 이하 조신들이 참석해 의례를 마치고 연회를 여는 와중에 좌근진관이 달려와 큰 목소리로 "고려국 사람이 쓰시마와 이키를 치고 비젠에 도착하였으며, 이곳까지 올 것이다"라고 외치자 장내에 있던 대신들이 모두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고, 세 대신이 선례도 잊은 채 동쪽 계단으로 황급히 내려갈만큼 일본 조정은 전율하였다(고려가 교토까지 치고 올라온다는 소식은 사실은 오보였다.). 일본측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더욱 경화되었다.
여진족의 일본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 몽골의 일본 침략, 그리고 중국의 문명-야만 구분법을 모방한 후 여진족을 "타타르" "야만족"으로 간주한 일본의 인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주족 부족의 통일을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등, 후세기에 만주족에 대한 일본의 적대적인 시각과 적대감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 (에조치)가 만주족이 살던 타타리 (오랑카이)로 가는 육교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여 만주족이 일본을 침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27년, 도쿠가와 막부는 후금의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겠다는 메시지를 쓰시마를 통해 조선에 보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12]
2. 1. 9세기 ~ 11세기 일본 연안의 해적 활동
9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일본 연안에는 해적들이 출몰해 관물을 실은 배를 습격하거나 약탈하였다. 특히 피해가 심한 곳은 규슈 지역인 지쿠젠, 지쿠고, 히젠, 히고, 사쓰마 등지였다.[26] 일본 연안에 출몰하는 해적 가운데는 외국, 특히 신라에서 온 해적(신라구)도 있는가 하면, 현지 해상 세력이 관리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해적질에 나서거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처럼 이들 해적을 진압하러 온 관리로써 아예 현지에 눌러앉아 그 자신이 해적의 두령이 되어 관물 약탈에 나서는 자들도 있었다.고려 태조 20년/일본 조헤이(承平) 7년 고려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교 의사를 밝히고 국첩을 바쳤지만,[26] 일본은 2년 가까이 지난 고려 태조 22년/덴교 원년 2월에야 오에노 아사쓰나를 시켜 고려의 광평성 앞으로 보내는 답서를 작성하게 하였고,[27] 3월에 다자이후를 통해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답서를 전달하였다. 고려 태조 23년/덴교 3년 6월에도 고려는 일본에 첩장을 보냈지만, 일본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고려 성종 16년/일본 조토쿠(長德) 3년 6월, 고려는 다자이후의 일본인을 시켜 일본국완(日本國宛) · 쓰시마도사완(對馬島司宛) · 쓰시마완(對馬宛) 등 세 통의 첩장을 일본측에 전달하였는데, 고려측의 첩장을 접한 일본 정부는 지난번의 첩장과는 달리 상당히 비례(非禮)임을 지적하였고, 다자이후에서 신청한 4개 조항을 서둘러 허락하고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번호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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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규슈 각 고쿠시들에게 무기와 무구를 수리하고 보수하게 할 것. |
2 | 다자이후 관내의 여러 신들의 위계를 1계씩 승급시킬 것. |
3 | 가시이 묘(香推廟)에 봉호를 25호 더 증진시킬 것. |
4 | 나약한 쓰시마노카미 다카하시노 나카타마(高橋仲堪) 대신 다자이노다이칸(大宰大監) 다이라노 나카카타(平中方)에게 쓰시마 섬의 경비를 맡길 것. |
1019년 당시, '도이'(되한국어)는 한국어로 '오랑캐'를 의미했다. 도이 해적은 약 50척의 배를 이끌고 고려 방향에서 출발하여 1019년 3월 27일부터 쓰시마와 이키를 공격했다. 이키섬의 후지와라 노타다가 이끄는 147명의 수비대가 전멸한 후, 여진족 해적들은 일본인 남자를 모두 살해하고 일본 여성들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인 총독 후지와라 노타다도 살해당했다.[6]
이후 지쿠젠국의 이도, 시마, 사와라 현을 약탈했고, 4월 9일에는 하카타를 공격했다. 일주일 동안 하카타만의 노코 섬을 기지로 삼아 마을을 약탈하고 주로 여성과 어린 소녀 등 1,000명 이상의 일본인을 노예로 납치했다. 다자이후, 규슈의 행정 중심지는 군대를 일으켜 해적을 성공적으로 몰아냈다.[7]
그 후 4월 13일부터 5월 20일까지 마쓰우라 현, 히젠국을 약탈했으며, 결국 "마쓰우라 48당"의 창시자인 겐치에게 격퇴당했고, 다시 쓰시마를 공격한 후 한반도로 퇴각했다.[8]
몇 달 후, 고려 사신 정자량(鄭子良한국어)은 고려 해군이 원산 근해에서 해적을 요격하여 섬멸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약 300명의 일본인 포로를 구출했다. 한국 억류 하에서 "그들은 흰 옷을 제공받았고 은식기로 식사를 했다". 그 후 한국 정부는 그들을 일본으로 송환했고, 다자이후의 감사를 받고 보상을 받았다. 포로로 잡혔던 두 여성, 구라노 이와메와 타지히노 아코미의 상세한 보고가 남아 있으며, 구라노 이와메의 보고가 필사되었다.[9]
여진족에게 납치된 일본인 아이들과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가 그들을 요격했을 때 8척의 배에 270명 또는 259명의 일본인만이 돌아왔다. 1280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고, 374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식량으로 380마리의 일본 소유 가축이 죽었다.[10]
이 여진족 해적들은 오늘날 함경도에 살았다.[11]
2. 2. 고려와 일본의 외교 관계
937년 고려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교 의사를 밝히고 국첩을 바쳤지만,[26] 일본은 2년 가까이 지난 939년 2월에야 오에노 아사쓰나(大江朝綱)를 시켜 고려의 광평성(廣評省) 앞으로 보내는 답서를 작성하게 하였고,[27] 3월에 다자이후를 통해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답서를 전달하였다. 940년 6월에도 고려는 일본에 첩장을 보냈지만, 일본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일본의 사학자 모리 가쓰미는 견당사 폐지(894년) 이후 국풍 문화에 심취한 일본 조정이 대외교섭에 소극적으로 변모해 외국의 교섭 요구에 상당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국의 김상기는 9세기 전반에 걸쳐 신라구 등 신라로부터의 무력 압박에 시달린 기억이 있었던 일본으로써는 신라를 병합하고 건국된 고려, 더욱이 그 자신이 해상 세력의 수장이기도 했던 왕건의 요구에 고심했을 것으로 보았다.997년 6월 고려는 다자이후의 일본인을 시켜 일본국완(日本國宛) · 쓰시마도사완(對馬島司宛) · 쓰시마완(對馬宛) 등 세 통의 첩장을 일본측에 전달하였는데, 고려측의 첩장을 접한 일본 정부는 지난 번의 첩장과는 달리 상당히 비례(非禮)임을 지적하였고, 다자이후에서 신청한 4개 조항을 서둘러 허락하고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순서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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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규슈 각 고쿠시(國司)들에게 무기와 무구를 수리하고 보수하게 할 것. |
2 | 다자이후 관내의 여러 신들의 위계를 1계씩 승급시킬 것. |
3 | 가시이 묘(香推廟)에 봉호를 25호 더 증진시킬 것. |
4 | 나약한 쓰시마노카미 다카하시노 나카타마(高橋仲堪) 대신 다자이노다이칸(大宰大監) 다이라노 나카카타(平中方)에게 쓰시마섬의 경비를 맡길 것. |
10월 1일, 조정 남전(南殿)에서 천황과 좌우 내대신 이하 조신들이 참석해 의례를 마치고 연회를 여는 와중에 좌근진관이 달려와 큰 목소리로 "고려국 사람이 쓰시마와 이키를 치고 비젠에 도착하였으며, 이곳까지 올 것이다"라고 외치자 장내에 있던 대신들이 모두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고, 세 대신이 선례도 잊은 채 동쪽 계단으로 황급히 내려갈만큼 일본 조정은 전율하였다(고려가 교토까지 치고 올라온다는 소식은 사실은 오보였다.). 일본측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더욱 경화되었다.
2. 3. 동북아시아 정세와 여진족의 등장
9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일본 연안에는 해적들이 출몰하여 규슈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들 중에는 신라에서 온 해적(신라구)도 있었고, 현지 해상 세력이 해적질에 나서거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처럼 해적 진압을 위해 파견된 관리가 해적 두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937년 고려 태조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교 의사를 밝혔으나, 일본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6][27] 이는 견당사 폐지(894년) 이후 국풍 문화에 심취한 일본 조정이 대외 교섭에 냉담해진 것과, 과거 신라구의 압박에 대한 기억 때문으로 해석된다.
997년 고려는 일본에 첩장을 보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무례하다고 여겨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1005년부터 고려는 여진의 해적 활동을 보고하기 시작했고, 1018년에는 우산국이 여진에 의해 멸망했다.
1019년 당시 '도이'(되한국어)는 한국어로 '오랑캐'를 의미했다. 도이 해적, 즉 여진족 해적은 약 50척의 배로 쓰시마와 이키를 공격하여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여자들을 포로로 잡았다.[6] 이후 지쿠젠국의 여러 현과 하카타만의 能古島일본어을 기지로 삼아 약탈을 일삼고, 1,000명 이상의 일본인을 노예로 납치했다. 다자이후의 군대가 이들을 몰아냈다.[7] 이후에도 히젠국 등을 약탈하다가 격퇴당하고 한반도로 퇴각했다.[8]
몇 달 후, 고려 사신 정자량(鄭子良한국어)은 고려 해군이 원산 근해에서 해적을 섬멸하고 약 300명의 일본인 포로를 구출했다고 보고했다. 고려는 이들을 일본으로 송환했고, 다자이후는 감사를 표하고 보상했다. 포로였던 두 여성의 상세한 보고가 남아있다.[9] 여진족에게 납치된 일본인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가 요격했을 때 270명 또는 259명의 일본인만이 돌아왔고, 128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374명이 살해되었다.[10]
이 여진족 해적들은 오늘날 함경도에 살았다.[11] 이 사건은 훗날 일본의 만주족에 대한 적대감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12]
「도이의 입구」의 주력은 여진족으로 추정된다. 여진족은 12세기에 금을, 17세기에는 후금을 거쳐 청을 건국하는 민족이다. 10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 아무르강 수계 및 연해주 동해 연안부에 여진족 일파가 진출하여 교역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926년 발해 멸망, 985년 정안국 멸망, 991년 거란의 압록강 유역 삼책 설치 등으로 여진의 교역 루트가 축소되면서, 여진의 고려 연안 습격이 활발해졌다. 1019년 북규슈를 습격한 "도이의 입구"는 이러한 동북아시아 정세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당시 여진족의 일부는 고려에 조공하고 있었고, 일본 측에 붙잡힌 포로 3명이 모두 고려인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고려의 단속 책임을 묻는 주장도 있었다.[17]
3. 경위
1019년, 한국어로 '오랑캐'를 뜻하는 '도이'(되한국어, ''Doe'') 해적들이 고려 방향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공격했다. 3월 27일부터 쓰시마와 이키를 공격하여 이키의 수비대 147명을 전멸시키고, 일본인 남자를 모두 살해하고 일본 여성들을 포로로 잡았다. 후지와라 노타다도 살해당했다.[6]
이후 지쿠젠국의 이도, 시마, 사와라 현을 약탈했고, 4월 9일에는 하카타를 공격했다. 일주일 동안 하카타만의 能古島|노코섬일본어을 기지로 삼아 마을을 약탈하고 1,000명 이상의 일본인을 노예로 납치했다. 다자이후의 군대가 해적을 몰아냈고,[7] 4월 13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히젠국 마쓰우라 현을 약탈했으나, "마쓰우라 48당"의 창시자인 겐치에게 격퇴당하고 다시 쓰시마를 공격한 후 한반도로 퇴각했다.[8]
몇 달 후, 고려 사신 정자량은 고려 해군이 원산 근해에서 해적을 요격하여 섬멸하고 약 300명의 일본인 포로를 구출했다고 보고했다. 고려는 이들을 일본으로 송환했고, 이들은 다자이후의 감사를 받고 보상을 받았다. 포로로 잡혔던 구라노 이와메와 타지히노 아코미 두 여성의 상세한 보고가 남아 있다.[9]
여진족에게 납치된 일본인 아이들과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가 이들을 요격했을 때 8척의 배에 270명 또는 259명의 일본인만이 돌아왔다. 1280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고, 374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식량으로 380마리의 일본 소유 가축이 죽었다.[10]
이 여진족 해적들은 오늘날 함경도에 살았다.[11]
3. 1. 침공의 시작
간닌 3년(1019년) 3월 27일(양력 5월 10일) 약 50척의 해적선(약 3천 명 정도) 선단이 쓰시마를 습격했다. 이들은 섬 각지에서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으며, 당시 쓰시마의 고쿠시였던 쓰시마노카미(対馬守) 후지와라노 도하루(藤原遠晴)는 가까스로 섬을 탈출해 다자이후로 달아났다.[6]
쓰시마에 이어 해적 선단은 이키 섬을 습격했다. 노인과 아이는 살해되고, 성인 남녀는 배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으며, 가옥이 불타고 가축들은 도축되어 먹혔다. 급보를 접한 이키노카미(壱岐守) 후지와라노 마사타다(藤原理忠)는 겨우 147명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6] 해적들은 이어 이키 고쿠분지(國分寺)인 도분지(嶋分寺)를 불태우려 했다. 이에 맞서 이키 섬 안의 사찰을 총괄 책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도분지 승려 소가쿠(常覚)의 지휘 아래 승려나 현지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해 세 차례에 걸쳐 해적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해적들의 맹렬한 공격 앞에 끝내 무너졌다. 소가쿠는 죽기 직전 한 사람을 섬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는 무사히 다자이후에 도착해 사태를 알렸다. 도분지의 승려들은 전원 전멸했으며, 도분지는 불타버렸다.
이후 해적 선단은 지쿠젠국으로 상륙, 4월 8일부터 12일까지 이토군, 시마군, 사와라군을 습격하고 다자이후 코앞인 하카타 주변까지 밀고 들어왔다.[7] 그러나 잠시 날씨가 좋지 않아 해적 선단의 진격이 지체되는 틈을 타서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權帥)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가 규슈 호족과 무사단을 소집, 인솔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규슈 상륙을 저지했다. 하카타 상륙에 실패한 해적 선단은 4월 13일(양력 5월 26일) 비젠국(肥前国) 마쓰라 군(松浦郡)을 습격했지만, 미나모토노 지에(源知, 마쓰라토松浦党의 시조)에게 격퇴당하고[8] 다시 쓰시마를 공격한 다음 한반도 방면으로 퇴각한다.
3. 2. 이키섬 공격
간닌 3년(1019년) 3월 27일(양력 5월 10일) 쓰시마를 습격한 해적들은 이어서 이키 섬을 공격했다. 노인과 아이는 살해되고, 성인 남녀는 배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으며, 가옥은 불타고 가축들은 도축되어 먹혔다.[6] 이키의 고쿠시인 이키노카미(壱岐守) 후지와라노 리타다는 겨우 147명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중과부적으로 전사한다.[6]해적들은 이키 고쿠분지(國分寺)인 도분지(嶋分寺)를 불태우려 했다. 이에 맞서 이키 섬 안의 사찰을 총괄 책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도분지 승려 소가쿠(常覚)의 지휘 아래 승려나 현지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해 세 차례에 걸쳐 해적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해적들의 맹렬한 공격 앞에 끝내 무너졌다. 소가쿠는 죽기 직전 한 사람을 섬에서 탈출시켰고, 그는 무사히 다자이후에 도착해 사태를 알렸다. 도분지의 승려들은 전원 전멸했으며, 도분지는 불타버렸다.[6] 이때 섬 주민 148명이 학살되었고, 여성 239명이 납치되었다. 생존자는 겨우 35명이었다.
3. 3. 규슈 본토 공격
간닌 3년(1019년) 3월 27일(양력 5월 10일), 고려 방향에서 온 '도이'(되|오랑캐한국어) 해적들이 약 50척의 배를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했다. 이후 이키를 습격하여 이키의 수비대 147명을 전멸시키고, 일본인 남자를 모두 살해하고 일본인 여성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키노카미(壱岐守) 후지와라 노타다도 살해당했다.[6]이후 해적 선단은 지쿠젠국으로 상륙, 4월 8일부터 12일까지 이토군, 시마군, 사와라군을 습격하고 하카타 주변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權帥)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가 규슈 호족과 무사단을 이끌고 이들을 격퇴하여 규슈 상륙을 저지했다.
하카타 상륙에 실패한 해적들은 4월 13일(양력 5월 26일) 비젠국(肥前国) 마쓰라 군(松浦郡)을 습격했지만, 마쓰라토松浦党의 시조 미나모토노 지에(源知)에게 격퇴당하고 다시 쓰시마를 공격한 다음 한반도 방면으로 퇴각했다.[8]
몇 달 후, 고려 사신 정자량(鄭子良)은 고려 해군이 원산 근해에서 해적을 요격하여 섬멸하고 약 300명의 일본인 포로를 구출했다고 보고했다. 고려는 이들을 일본으로 송환했고, 이들은 다자이후의 감사를 받고 보상을 받았다. 포로로 잡혔던 구라노 이와메와 타지히노 아코미 두 여성의 상세한 보고가 남아 있다.[9]
여진족에게 납치된 일본인 아이들과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가 이들을 요격했을 때 8척의 배에 270명 또는 259명의 일본인만이 돌아왔다. 1280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고, 374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식량으로 380마리의 일본 소유 가축이 죽었다.[10]
3. 4. 고려 연안에서의 습격
다자이노곤노소치 후지와라노 다카이에 등에게 습격당한 해적 선단은 다시 한반도로 가서 고려 연안에서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가 고려 수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일기 《소우기》(小右記)에는 쓰시마의 한간다이(判官代) 나가미네노 모로치카(長嶺諸近)와 함께 귀국한 일본인 여성 10명 가운데 쿠라노 이와메(内蔵石女)와 타지히노 아코미(多治比阿古見)가 다자이후에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28] 이들 해적은 고려 연안에서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상륙해 약탈을 벌였고, 남녀를 붙잡아서 건강한 사람만 솎아내고 노약자는 때려 죽이고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18] 그러나 고려의 수군에 의해 격퇴당했고, 이때 납치되었던 일본인 약 300명이 고려 수군에 구출되어 김해부에서 고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이와메와 아코미 역시 고려군이 도이 해적선을 습격했을 때 적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다가 고려군에 의해 구조되었다).[9]고려 수군에 의해 구출된 일본인 포로들은 김해부에서 흰 모시로 지은 옷을 지급받았고, 은그릇으로 담은 식사를 지급받는 등 후대를 받고 귀국했다. 고려측은 도이들이 다섯 군데로 나누어 수용하고 있던 일본인 포로 가운데 3개 소의 3백 명을 구출했으며 이들을 먼저 일본으로 송환하고 나머지 포로들도 모두 모아 송환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나가미네노 모로치카가 전한 고려 수군에 의한 도이 해적 격퇴와 일본인 포로 송환 사실에 대해 한국의 《고려사》 권4 현종 10년(1019) 4월조 및 《고려사절요》에는 고려의 진명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部署) 장위남 등이 해적 8척을 잡아 취조한 결과 해적선 안에서 일본인 남녀 259명의 포로를 찾아냈고 공역령 정자량을 시켜서 그들을 본토로 송환하게 하였다고 한다. 다만 일본측 기록인 《소우기》는 고려 수군이 도이 해적을 격멸하고 포로를 탈취한 때를 5월이라고 했고, 정자량이 온 것은 다음달인 6월의 일이라고 해서 《고려사》와는 시기가 서로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다.[28]
그러나 이러한 고려측의 환대도 겁에 질린 일본측의 경계심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소우기》에는 「도이의 공격이 고려의 짓이 아니라고 판단되나 신라는 원래 우리의 적이고 국호를 바꾸었다고는 해도 그 야심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설령 포로들을 보내 주었다고 해도 기뻐할 일은 아니다. 승리의 기세를 다시 호기라고 속아 넘어갔다가 자칫 도항 금지의 제(制)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라고, 고려로부터의 어떠한 문서나 첩장도 없이 도항한 것을 경계하는 다자이후의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4. 결과
1019년 당시, '도이'(되한국어)는 한국어로 '오랑캐'를 의미했다. 도이 해적은 약 50척의 배를 이끌고 고려 방향에서 출발하여 1019년 3월 27일부터 쓰시마와 이키를 공격했다. 이키섬의 후지와라 노타다가 이끄는 147명의 수비대가 전멸한 후, 여진족 해적들은 일본인 남자를 모두 살해하고 일본 여성들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인 총독 후지와라 노타다도 살해당했다.[6]
이후 지쿠젠국의 이도, 시마, 사와라 현을 약탈했고, 4월 9일에는 하카타를 공격했다. 일주일 동안 하카타만의 能古島|노코섬일본어을 기지로 삼아 마을을 약탈하고 주로 여성과 어린 소녀 등 1,000명 이상의 일본인을 노예로 납치했다. 다자이후, 규슈의 행정 중심지는 군대를 일으켜 해적을 성공적으로 몰아냈다.[7]
그 후 4월 13일부터 5월 20일까지 마쓰우라 현, 히젠국을 약탈했으며, 결국 "마쓰우라 48당"의 창시자인 겐치에게 격퇴당했고, 다시 쓰시마를 공격한 후 한반도로 퇴각했다.[8]
몇 달 후, 고려 사신 정자량은 고려 해군이 원산 근해에서 해적을 요격하여 섬멸했다고 보고했다. 고려 해군은 약 300명의 일본인 포로를 구출했다. 일본인 포로들은 고려에서 흰 옷을 제공받았고 은식기로 식사를 했다. 그 후 고려 정부는 그들을 일본으로 송환했고, 다자이후의 감사를 받고 보상을 받았다. 포로로 잡혔던 두 여성, 구라노 이와메와 타지히노 아코미의 상세한 보고가 남아 있으며, 구라노 이와메의 보고가 필사되었다.[9]
여진족에게 납치된 일본인 아이들과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가 그들을 요격했을 때 8척의 배에 270명 또는 259명의 일본인만이 돌아왔다. 1280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고, 374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식량으로 380마리의 일본 소유 가축이 죽었다.[10] 이 여진족 해적들은 오늘날 함경도에 살았다.[11]
여진족의 일본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 몽골의 일본 침공, 그리고 중국의 문명-야만 구분법을 모방한 후 여진족을 "타타르", "야만족"으로 간주한 일본의 인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주족 부족의 통일을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등, 후세기에 만주족에 대한 일본의 적대적인 시각과 적대감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에조치)가 만주족이 살던 타타리(오랑카이)로 가는 육교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여 만주족이 일본을 침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27년, 도쿠가와 막부는 후금의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겠다는 메시지를 쓰시마를 통해 조선에 보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12]
4. 1. 침공의 주체
도이의 입구의 침공 주체는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10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아무르강 유역 및 블라디보스토크 지역과 그 북부 연해주 연안에 진출해 있었으며, 오호츠크해 방면으로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동단국이나 숙여진의 모체가 되었던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동해로 진출한 그룹 중 하나로, 동해 연안을 따라 한반도를 거쳐 남하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6]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985년 발해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마저 멸망하면서 만주 지역의 말갈 · 여진계 종족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발해를 통해 송나라 등지로 토산품을 수출하던 교역 루트가 축소되었고, 991년 거란이 압록강 유역에 목책을 세우면서 서쪽과의 교역로마저 막혔다. 2년 뒤 고려 서희와 거란 소손녕의 담판으로 고려가 강동 6주를 확보하면서, 여진은 고려 연안으로 공격을 활발하게 감행하게 되었다.
1005년 고려에서 여진의 해적 활동이 처음 보고되었고, 1018년에는 울릉도가 여진에 의해 멸망당했다. 1019년 일본 기타큐슈를 습격한 '도이의 입구' 사건은 이러한 북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진족 일부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며 조공했고, 일본 근해에서 해적 행위를 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일본 측 포로 중 고려인이 있었던 탓에, 일본은 여진 해적의 배후에 고려가 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7]
도이 해적은 약 50척의 배를 이끌고 고려 방향에서 출발하여 1019년 3월 27일부터 쓰시마와 이키를 공격했다. 이키섬 수비대가 전멸하고 일본인 남자는 모두 살해되었으며, 여성들은 포로가 되었다.[8] 이후 지쿠젠국의 여러 현을 약탈하고 하카타만의 노코섬을 기지로 삼아 일본인을 노예로 납치했다. 다자이후의 군대에 의해 격퇴된 후에도 히젠국 등을 약탈하다 겐치에게 격퇴당하고 한반도로 퇴각했다.[9]
몇 달 후, 고려 사신 정자량은 고려 해군이 원산 근해에서 해적을 섬멸하고 일본인 포로 300명을 구출했다고 보고했다. 포로들은 일본으로 송환되어 감사를 받았다. 포로였던 두 여성의 상세한 보고가 남아있다.[10] 여진족에게 납치된 일본인 아이들과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가 요격했을 때 8척의 배에 270명 또는 259명의 일본인만이 돌아왔다. 1280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고, 374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380마리의 가축이 죽었다.[12]
이 여진족 해적들은 오늘날 함경도에 살았다.[13] 여진족의 일본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 몽골의 일본 침략, 그리고 중국의 문명-야만 구분법을 모방한 후 여진족을 "타타르", "야만족"으로 간주한 일본의 인식은 후세기에 만주족에 대한 일본의 적대적인 시각과 적대감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4. 2. 일본 측의 피해
쓰시마와 이키 지역은 도이의 입구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쓰시마 은광이 불탔고, 쓰시마에서는 36명이 살해되고 346명(남자 102명, 여자와 아이 244명)이 납치되었다.[6] 이들 중 270명 가량은 훗날 고려 수군에 의해 구출되어 쓰시마으로 돌아왔다. 이키에서는 이키노카미 후지와라노 마사타다가 전사하는 등 주민 148명이 학살당하고, 여성 239명이 납치되었다.[6] 이키에 남은 주민은 고작 35명뿐이었는데, 이는 이키 전체가 아닌 이키 국아(国衙) 부근의 피해만 집계한 것으로 추정된다.[20]기록에 따르면, 피살된 사람은 365명, 납치된 사람은 1,289명이며, 소와 말 380필, 가옥 45동 이상이 손실을 입었다.[6] 고려가 구출하여 일본으로 송환한 포로는 270명 또는 259명이었다.[10] 1280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고, 374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식량으로 380마리의 일본 소유 가축이 죽었다.[10] 다자이후의 보고에 따르면 2주간의 전투 기간 동안 364명이 살해당하고, 1280명이 납치되었으며, 소와 말의 피해는 355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의 피해가 두드러졌으며[20], 납치된 일본인 아이들과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다음은 피해 상황을 정리한 표이다.
구분 | 쓰시마 | 이키 | 기타 지역 | 총계 |
---|---|---|---|---|
피살 | 36명 | 148명 | 최소 181명[6][10] | 365명[6](또는 374명[10]) |
납치 | 346명 | 239명+α | 최소 704명[6][7] | 1,289명[6](또는 1280명[10]) |
가축 피해 | - | - | 380필[6](또는 355마리) | 380필[6](또는 355마리) |
가옥 피해 | - | - | 45동 이상[6] | 45동 이상[6] |
4. 3. 고려의 구원과 양국 관계 개선
1019년 지쿠젠 시마군(志摩郡)에 고려 상인 말근달(末斤達)이 표류해 왔다. 그는 자신이 송과 교역하는 상인이라 밝혔으나, 다자이후 관리들은 믿지 않았다.[28]한편, 다자이노곤노소치 후지와라노 다카이에 등에게 습격당한 해적 선단은 한반도로 가서 고려 연안에서도 약탈을 자행했다가 고려 수군에 격퇴되었다.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일기 《소우기》(小右記)에는 쓰시마 한간다이(判官代) 나가미네노 모로치카(長嶺諸近)와 함께 귀국한 일본인 여성 10명 가운데 쿠라노 이와메(内蔵石女)와 타지히노 아코미(多治比阿古見)가 다자이후에 제출한 보고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보고서에는 해적들이 고려 연안에서 매일 날이 밝기 전 상륙해 약탈을 벌였고, 건강한 사람만 골라내고 노약자는 죽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고려 수군에 의해 해적들이 격퇴되었고, 이때 납치되었던 일본인 약 300명이 김해부에서 고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28]
고려 수군에 구출된 일본인 포로들은 김해부에서 흰 모시 옷과 은그릇에 담긴 식사를 제공받는 등 후한 대접을 받고 귀국했다. 고려는 도이들이 다섯 군데로 나누어 수용하고 있던 일본인 포로 가운데 3개 소의 300명을 구출해 먼저 일본으로 송환하고, 나머지도 모두 모아 송환할 것을 약속했다. 나가미네노 모로치카가 전한 고려 수군에 의한 도이 해적 격퇴와 일본인 포로 송환 사실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려 진명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部署) 장위남 등이 해적 8척을 잡아 취조한 결과, 일본인 남녀 259명을 찾아내 정자량을 시켜 본토로 송환하게 했다고 한다. 다만, 일본 측 기록인 《소우기》는 고려 수군이 도이 해적을 격멸하고 포로를 탈취한 때를 5월, 정자량이 온 것은 6월이라고 하여 《고려사》와 시기가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다.[28]
이러한 고려의 환대에도 일본 측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소우기》에는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야심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의심과 함께, 포로 송환이 승전의 기세를 이용한 속임수일 수 있다는 다자이후의 보고서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28]
4. 4. 일본 조정의 대응
일본 조정은 처음에 도이의 입구가 누구의 소행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후지와라노 다카이에가 하카타에서 이들을 격퇴하고 잡은 포로 대부분이 고려인이었고, 이들은 "고려에 쳐들어온 도이들에게 잡혀온 것"이라고 진술했지만, 과거 신라나 고려 해적의 잦은 규슈 침입으로 인해 다자이후와 조정은 반신반의했다.7월 7일(양력 8월 16일), 고려로 밀항했던 쓰시마 한간다이 나가미네노 모로치카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백모와 함께 귀국하여 사정을 전하고, 9월에 고려 공역령 정자량이 이끄는 사신단과 함께 일본인 270명이 귀국하면서 오해가 풀렸다. 고려 사신은 이듬해 2월 다자이후에서 고려 안동도호부에 보내는 글을 가지고 귀국했다. 다자이노곤노소치 후지와라노 다카이에는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황금 300냥을 주었다고 한다.[23][24]
사건이 일단락된 후에야 일본 조정이 이 사건을 접했지만, 해안 방비 병력인 사키모리와 노 등을 부활시켜 대규모 방위 태세를 갖춘 신라 해적 침공 때와는 달리, 재발 방지를 위한 방어 태세에 들어간 흔적은 없다. 격퇴에 공을 세운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에게 포상이 내려지지도 않았다. 당시 일본은 송을 포함한 주변국과의 관계가 양호했기 때문에 외국의 위협에 대한 방비가 허술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18일, 조정에서 열린 진정에서 우대신 후지와라 킨스에는 산인도, 산요도, 난카이도의 경계 강화를 제안했지만, 후지와라 사네스케는 신라의 입구 때의 선례를 따라 호쿠리쿠도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29일 진정에서는 은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후지와라 유키나리, 후지와라 킨토는 은상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후지와라 사네스케는 894년 신라의 입구 때의 예를 들어 은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은상을 주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전투에서 활약한 오쿠라노 타네키가 이키노카미(壱岐守)로 서임되었다.[22]
9월 22일 진정에서는 고려사 대응이 검토되었는데, 태정대신 후지와라 미치나가는 신라사가 공물을 바쳤을 때의 선례를 따라 쌀과 비단을 주어 귀국시켜야 한다고 후지와라 사네스케에게 전했다. 일본 측 정세가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여 답례품을 가지고 빨리 돌려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5.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와 규슈 무사단
후지와라노 다카이에는 나카간파쿠 가(中関白家) 출신의 공경으로, 눈병 치료를 위해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 관직을 띠고 다자이후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무관은 아니었으나 도이의 입구 당시 도이 격퇴의 총지휘관으로써 활약하였고 이를 통해 무인으로써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25]
규슈 지역의 무사단 및 도고쿠(東国)에서 파견된 무사단 가운데 도이 추토에 활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 | 비고 |
---|---|
오쿠라 다네키(大蔵種材) ・ 미쓰히로(光弘) | |
후지와라노 아키노리(藤原明範) ・ 스케타카(助高) ・ 도모치카(友近) ・ 무네타카(致孝) | |
다이라노 무네유키(平致行, 무네미쓰(致光)?) | |
다이라노 다메카타(平為賢, 為方 ・ 다이죠 다메카타(大掾為賢)라고도 함) ・ 다메타다(為忠, 다메무네(為宗)) | |
다카라베노 히로치카(財部弘近) ・ 히로노부(弘延) | |
기노 시게카타(紀重方) | |
훈야노 요시미쓰(文屋恵光, 다다미쓰(忠光)) | |
다지히노 히사아키라(多治久明) | |
미나모토노 지에(源知) | 훗날 수군 마쓰라토(松浦党)의 선조 |
승려 소가쿠(常覚) |
이들은 거의 모집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미나모토노 지에는 훗날 수군 마쓰라토(松浦党)의 선조의 한 사람으로써 등장하며 그 땅에서 해적을 추토하고 최종적으로 그들을 물러나게 하는 데에 활약하였다.
한편 중세 일본의 대호족 기쿠치씨는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자손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시이 스스무(石井進)는 재지 관인인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 후지와라노 마사노리(藤原蔵規)라는 인물이 실제 기쿠치씨의 조상일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규슈 ・ 도고쿠(東国) 무사단은 진제이 헤이시(鎮西平氏)로도 불리며, 그 가운데 이사 다메카타(伊佐為賢, 다이라노 다메카타)가 히젠국 가시마(鹿島)의 후지쓰 장(藤津荘)에 토착해서 히젠 이사 씨(肥前伊佐氏)가 되었다. 사쓰마 헤이시(薩摩平氏)는 그 후위(後衛)를 맡았던 가문으로 칭해지고 있다.
6. 역사적 의의 및 평가
1019년 당시 '도이'(되|Doe한국어)는 한국어로 '오랑캐'를 의미했다.[6] 도이 해적은 약 50척의 배를 이끌고 고려 방향에서 출발하여 1019년 3월 27일부터 쓰시마와 이키를 공격,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여성들을 포로로 잡았다.[6] 이후 지쿠젠국의 여러 현과 하카타만의 能古島|노코섬일본어을 기지로 삼아 마을을 약탈하고 1,000명 이상의 일본인을 노예로 납치했으나, 다자이후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7] 4월 13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히젠, 마쓰우라 현을 약탈, "마쓰우라 48당"의 창시자인 겐치에게 격퇴당했고, 다시 쓰시마를 공격한 후 한반도로 퇴각했다.[8]
몇 달 후, 고려 사신 정자량(鄭子良한국어)은 고려 해군이 원산 근해에서 해적을 요격하여 섬멸하고 약 300명의 일본인 포로를 구출했다고 보고했다. 고려는 일본인 포로들을 일본으로 송환했고, 이들은 다자이후의 감사를 받고 보상을 받았다. 포로로 잡혔던 구라노 이와메와 타지히노 아코미 두 여성의 상세한 보고가 남아 있다.[9]
여진족에게 납치된 일본인 아이들과 여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매춘부와 성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가 그들을 요격했을 때 8척의 배에 270명 또는 259명의 일본인만이 돌아왔다. 1280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고, 374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으며, 식량으로 380마리의 일본 소유 가축이 죽었다.[10] 이 여진족 해적들은 오늘날 함경도에 살았다.[11]
여진족의 일본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 몽골의 일본 침략, 그리고 중국의 문명-야만 구분법을 모방한 후 여진족을 "타타르", "야만족"으로 간주한 일본의 인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주족 부족의 통일을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등, 후세기에 만주족에 대한 일본의 적대적인 시각과 적대감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에조치)가 만주족이 살던 타타리(오랑카이)로 가는 육교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여 만주족이 일본을 침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27년, 도쿠가와 막부는 후금의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겠다는 메시지를 쓰시마를 통해 조선에 보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12]
7. 관련 사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소우기(小右記), 조야군재(朝野群載) 등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사서인 고려사 등에는 거의 기사가 없다.[1]
- 소우기(小右記) - 구교(公卿)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実資, 957~1046)의 일기[1]
- 원문은 도쿄 대학 사료 편찬소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읽을 수 있다.[1]
- 독해 문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섭관기 고기록 데이터베이스'에서 공개되고 있다.[1]
- 현대어역 쇼유키(전 16권), 쿠라모토 카즈히로 편, 킷카와 코분칸, 2015년 10월 - 2023년 4월[1]
- 발췌판 쇼유키 일본의 고전, 쿠라모토 카즈히로 편, 카도카와 소피아 문고 비기너스 클래식스, 2023년[1]
- 조야군재(朝野群載)[1]
- 고려사[1]
- 하나와 호키이치가 편집한 계림습엽(1883)은 국사나 공가의 일기 등에서 일조 관계 자료를 발췌한 부류기이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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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Kodansha Encyclopedia of Japan, Volume 2
https://books.google[...]
Kodansha
198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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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Scribner
1988
[3]
서적
Heian Japan, Centers and Peripheri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ʻi Press
2007
[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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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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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2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6]
서적
The Economic Aspects of the History of the Civilization of Japan, Volume 1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4
[7]
학술지
Thoughts on Hakata Kegosho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https://cir.nii.ac.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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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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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kawa Publishing Co., Ltd.
[9]
서적
朝鮮學報, Issues 198-201
https://books.google[...]
朝鮮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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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Gateway to Japan: Hakata in War and Peace, 500-13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6-01-31
[11]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oma & Sekey Books
[12]
Dissertation
Japan and Its East Asian Neighbors: Japan's Perception of China and Korea and the Making of Foreign Policy From the Seventee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The Ohio State University
2004
[13]
문서
「小右記」
[14]
웹사이트
『刀伊の入寇』/関幸彦インタビュー
https://www.chuko.co[...]
中公新書
2022-03-17
[15]
문서
女真のうち、黒水靺鞨に服属し中国化が進んでた渤海人のグループ。対して、ツングース系本来の生活スタイルを守っていたグループは生女真と呼ばれる。
[16]
문서
中村和之 「『混一疆理歴代国都之図』にみえる女真の活動」(混一疆理歴代国都之図研究プロジェクト 国際シンポジウム「混一疆理歴代国都之図とその周辺」2012年12月8日 の講演より)
[17]
문서
『小右記』5巻140頁。寛仁3年4月25日
[18]
문서
『小右記』5巻180頁。寛仁3年8月3日
[19]
문서
『小右記』5巻177頁。寛仁3年8月3日
[20]
문서
寛仁三年四月十七日~同年七月十三日条。大日本資料2-14、213~312頁。
2022-11
[21]
문서
『小右記』 寛仁3年4月17日条
[22]
웹사이트
大蔵種材(おおくらのたねき)とは
https://kotobank.jp/[...]
[23]
문서
このことは『大鏡』にも記述がみられるが、高麗ではなく、旧称の新羅と記述している。
[24]
학술지
海民の日本史4
http://id.nii.ac.jp/[...]
東洋大学国際学部
2019-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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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因は『御堂関白記』によれば「突目」、すなわち先の尖った物による外傷のため。
[26]
문서
《일본기략》(日本紀略) 承平 7년 8월조
[27]
문서
《정신공기초》(貞信公記抄) 덴교 2년 2월조
[28]
서적
일본과 조선의 2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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